퓰리처상 수상작가 에르난 디아스,
더 대담하고 생생한 『트러스트』 이전의 세계
호칸의 귀로 사람의 말을 듣고 그의 사고로 세상을 이해하고
그의 시선으로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잠시
다른 존재가 되었다. 부끄러움과 수치를 아는 호칸이
간결한 단어로 내뱉는 짧은 말은 더없이 직관적이고 명료해서 슬프다.
순수하고 강렬한 인물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는, 경이롭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최진영(소설가)
2023년 퓰리처상 수상작이자 국내 독자에게도 커다란 사랑을 받은 『트러스트』의 작가 에르난 디아스의 장편소설 『먼 곳에서』가 출간되었다. 작가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2017년 소규모 비영리 출판사의 원고 공모를 통해 출간되었다. 신인 작가의 첫 작품인데다 작은 출판사를 통해 소개된 이 소설에 관심이 집중된 것은 이듬해 봄, 『먼 곳에서』가 퓰리처상과 펜/포크너상 최종후보에 이름을 올린 후였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괴물 같은 신인과 작품에 전 세계 언론은 깜짝 놀라는 동시에 “황홀하다”(〈뉴욕 타임스〉), “이 데뷔작이 왜 퓰리처상 최종후보에 올랐는지 완벽하게 이해된다”(〈르피가로〉)와 같은 찬사를 쏟아냈고, 에르난 디아스는 단숨에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촉망받는 젊은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낯선 땅에 홀로 떨어지게 된 이방인 호칸의 평생에 걸친 여정과 깊은 고독을 고통스러울 만큼 아름답게 그린 『먼 곳에서』는 사로얀 국제상, 캐벌 어워드, 뉴 아메리칸 보이스 어워드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고, 〈퍼블리셔스 위클리〉 선정 올해의 책 top 10, 〈릿허브〉 선정 지난 10년간 최고의 소설 top 20에 이름을 올렸다.
눈앞의 지평선만큼이나 끝없는 고독을 견디며
그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 여행을 시작한
한 인간의 비통하고 아름다운 삶의 여정
알래스카의 얼어붙은 바다. 꽁꽁 언 얼음 아래에서 한 남자가 물위로 나와 말없이 배에 오른다. ‘호크(hawk)’, 즉 ‘매’라고 불리는 이 스웨덴인은 “인간성을 유지하는 선에서 가능한 최대의 몸집”을 가진 남자로,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은 그를 둘러싼 수많은 소문들을 이야기한다. 사자를 맨손으로 죽였다느니, 한때 원주민 추장이었다느니, 미국에서 그의 접근을 막기 위해 독립된 영토를 준다고 했다느니 하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오가는 사이, 불가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정확한 이름은 호칸 쇠데르스트룀으로, 스웨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형 리누스와 함께 아메리카로 가는 배에 올랐다. 뉴욕을 목적지로 출발한 두 사람은 포츠머스에 잠시 내리게 되고, 이때 호칸은 거리를 구경하다 형을 잃어버린다. 호칸은 여기저기 묻고 다닌 끝에 겨우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오르지만 형은 그 배에 없고, 설상가상으로 배는 뉴욕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에 호칸을 내려준다.
영어도 할 줄 모르고 변변한 말이나 식량도 없이 홀로 낯선 땅에 발을 디딘 호칸은 형을 찾아 동쪽으로 뉴욕까지 걸어가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이민자들의 행렬이 금광과 새로운 땅을 찾아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가운데 호칸은 홀로 그 흐름을 거슬러 나아가기 시작하고, 그 길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났다 헤어지고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맞닥뜨린다. 금광을 찾아 헤매는 아일랜드인 가족과 함께 움직이기도 하고, 치아가 없는 미스터리한 여인에게 납치되어 한동안 감금당한 채 생활하다가, 그곳에서 탈출한 뒤 만난 박물학자와 인디언으로부터 의술을 배우고, 원치 않는 폭력에 휘말려 사람을 해치는 바람에 현상수배범 신세가 되는가 하면, 그에게 마주 미소 짓는 이를 만나 짧은 평온을 누리기도 한다. 하지만 길고 긴 이 여정에서 줄곧 호칸과 동행하는 것은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과, 그 지평선만큼이나 끝없는 고독이다.
한없이 이어지는 미국의 황야를,
그리고 가장 깊은 고독을 가로지르는 서사시적 여정
이미 황폐한 땅에 새로운 황량함이 한 겹 더 내려앉았다. 점점 늘어만 가는 칸으로 이루어진 생기 없는 평원은 여전히 똑같았다. 태양은 언제나처럼 날카롭게, 또 뭉툭하게 찔러오며 만연했다. 그 물러서지 않는 단조로움에서 달라진 것, 납작하고 점점 더 납작해져가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깊이를 갖춘 것은 단 하나, 호칸의 외로움뿐이었다. 본문에서
호칸이 가로지르는 사막과 평원과 협곡은 끝없이 광활하고 평평하며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억압적인 단조로움”만을 전해주고, “뼈로 이루어진 듯한 그 허무한 공간”에서 호칸은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삼키는 공허함에 압도”되는 한편 이 황량하고 드넓은 땅에서 자신은 늘 혼자라는 사실에서 오는 절대적인 외로움을 마음속 깊이 절감하게 된다.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이조차 없는 땅에서 호칸이 느끼는 절제된 절망은 그의 얼마 안 되는 말과 그 말 사이의 침묵을 통해 새어나오고, 오로지 호칸의 눈으로 그의 여정 전체를 함께 보고 듣고 경험하는 독자에게는 이 모든 것이 더욱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마침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생겼을 때, 그를 돌봐주고 그에게 미소를 보내고 그를 위해 희생하는 이가 나타났을 때, “누군가의 눈에 보인다는 것, 누군가의 뇌에 들어간다는 것, 누군가의 의식 안에 살아간다는 것”은 호칸에게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거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이민자들의 행렬과 함께 움직이던 시기 호칸은 습격자들로부터 자기 자신과 일행을 지키려다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거구의 무법자에 대한 소문은 서부의 땅으로 점점 퍼져나간다. 그리고 사람을 해쳤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심과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호칸이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유폐되어 극한의 상황을 보내는 사이, 그는 일종의 전설이 된다. 어린 소년이던 시절 시작한 여정은 신화적인 존재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지지만, 이제 뉴욕에 가겠다는 애초의 목적은 어느샌가 증발해버리고 그저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 이 여정 자체가, 혹은 존재하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인적이 없는 거친 황무지만을 떠돌던 시절, 호칸이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피해 도망치던 것은 ‘이야기’였다. 자신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들었을 자신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알래스카에서 펼쳐지는 소설의 첫 장면에서, 호칸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무법자도 전설도 아닌 그저 호칸 쇠데르스트룀이라는 한 인간의 길고 긴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통하고 아름답고, 무엇보다 고독하고 또 고독한 그 찬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에르난 디아스가 탄생시킨 이 강렬한 인물에 완전히 사로잡혀, 어느새 그의 여정에 온 마음으로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출처: 교보문고